해병대에 복무하며 어렵게 중앙신학교 야간부에 다니던 시절, 평양 성화신학교 스승이셨던 박대선 목사님께서 연락을 해 오셨다. 목사님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계셨는데 여러 제자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애쓰셨다.
목사님께서는 나를 위해서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앨킨스시에 위치한 데이비드앤앨킨스대학 입학 허가와 장학금, 생활비 지원 약속까지 받아 주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 유학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런데 원서를 쓰다보니 나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주소였다. 해병대에 속해 있긴 해도 남한 땅 안에 내 개인 주소가 없었던 것이다. 평양을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 나그네로 살아 왔다는 것을 절감했다. 입학원서의 현주소란에 ‘해병대 제1여단 병기감실, 경기도 파주군’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다.
재정보증도 필요했다. 그때 미국 연수 시절 해병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한센 소위가 “언젠가 미국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게. 대학에 간다면 도와주겠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연락을 하니 흔쾌히 재정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해서 해병대에 입대한 지 5년 만에 군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다니던 서울 중앙신학교는 마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중도에 그만둔 신학교만 평양 성화신학교, 부산감리교신학교까지 세 곳이나 됐다.
이북에 두고 온 가족들과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슬펐다. 비록 자립을 했다지만 부산에 동생 승규를 두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승규는 “내 염려는 말고 꼭 박사학위까지 받고 돌아와야 해”라며 격려해 줬다.
1956년 1월, 김포공항을 떠나 20여 시간을 날아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다. 미국은 두 번째였지만 혼자라는 사실에 긴장이 됐다. 다행히 한국에서 알고 지낸 미국 선교사님이 미국 교인 한 분을 소개해 주셔서 그분이 공항에 마중을 나오셨다. 그분은 낯선 한국 청년을 환대해 주신 후 대륙횡단 시외버스인 ‘그레이하운드’에 태워 주셨다.
버스 여행은 무려 열흘이나 걸렸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고풍스런 캠퍼스를 보니 피로가 싹 가셨다. 800여명이 재학 중인 학교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수준 높은 도서관이나 실력 있는 교수진, 가족적인 분위기는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대학에는 다른 학교의 학점을 인정해 주는 제도가 없었지만 다행히 지도교수께서 “첫 학기 동안 실력을 보여 준다면 2년간의 학점을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력을 증명하려면 강의 시간과 숙제를 통해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는 4시간 동안 학생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은 한밤중밖에 없었다. 혹시 깊이 잠들까 봐 침대에 눕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잘 정도로 긴장한 채로 반년을 지냈다.
그 덕분에 첫 학기 성적이 잘 나와 중앙신학교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1년 반만 공부하면 드디어 대학 졸업장을 받는구나”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그러던 중 매일 아침 강당에서 드려지는 예배 설교를 부탁받았다. 영어로 설교한다는 사실이 무척 떨렸지만 살아온 과정을 열심히 설명했다. 일제 치하와 전쟁 중에 받은 박해와 아버지의 순교, 가족과의 이별, 피란 등 과거를 되짚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학생과 교직원들도 내가 쏟아내는 고난의 양에 놀라워하며 공감해 줬다. 그리고 이 일은 나에게 소중한 기회를 가져다 줬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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